역사적인 전함 범선 상선 모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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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ROYAL CAROLINE (길이 86cm x 높이 61cm)
(폭은 대부분 50cm 전후이어서 생략하였습니다, 이하 동일)
로얄 케롤라인호는 조지 2세와 그의 아내, 케롤라인
여왕의 유람선으로 제작된 요트로서 1750년 영국
뎃퍼드에서 건조되었다. 이 배는 영국 황실가족들의
유람용 외에도 영국과 네덜란드를 왕래하는 대신들의
교통수단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역사상 가장 호화롭게
꾸며진 요트 중 하나로 기록되어있다. 이 배의 함장들 중
엔 후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인 ‘William Cornwallis’경과
‘Hyde Parker’경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나중에 해군
제독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들이다. 1806년 이후로 이
배는 황실에 의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결국
1921년에 해체되었다.

02 MISSISSIPPI 1870 (112cm x 39cm)

1870 – 1920년까지 미시시피강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던 증기선으로, 여객선은 물론이고 농산물에서부터 가축운반까지 다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미국의 정서가 담겨있는 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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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이 창고에 단단히 포장되어 있어, 보유 모형을 다 보여드릴 수 없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03 H.M.S. BOUNTY (89cm x 74cm)

1787년 12월 24일, Bligh 선장의 지휘하에 44명의 선원이 승선한 ‘HMS Bounty’호는 ‘케이프 혼’을 향해 출항하였다. 이 항해는 카리브 연안의 식민지 에 이식되어져 노예들의 식량으로 재배될 대량의 빵나무 묘목을 확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0개월간의 긴 항해 끝에 타히티에 도착한 Bligh 선장은 어린 빵나무 묘목들이 준비 되기 까지는 다시 또 6개월을 기다려야만 되었는데, 별 수없이 그곳에서 묘목들이 준비 될 때 까지 기다리는 수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1789년 4월 28일 오전, ‘Fletcher Christian’과 그를 따르는 12명의 선원들에 의한 그 유명한 바운티호의 선상반란이 일어나게 되며, 선장을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은 구명선에 태워져 표류되어진다. 그 이후, 마침내 ‘Pitcairn Island’에 안전한 도피처를 찾아낸 그들은 그곳에서 바운티호를 불태워 버렸다.
04 BERLIN (81cm x 71cm)

프리깃함 베를린호는 Frederic William에 의해 브란덴부르크 해군에 대여된 최초의 전세 프리깃함들 중의 한 척이었다. 1674년에 젤란트에서 건조된 이 전함은 1688년까지 브란덴부르크 해군 함대의 주력을 이루고 있던 전함들중 하나였다.
05 BON HOMME RICHARD (63cm x 75cm)

1779년 미합중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폴 존스가 ‘Bon Homme Richard’ (본 홈 리처드)호의 함장으로 부임하였다. ‘본 홈 리처드’호는 벤자민 플랭클린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1779년, 9월 23일, ‘본 홈 리처드’호는 북해의 플램보로곶에서 영국의 프리깃함 세라피스호와 일전을 겨루게 되는데, 이 해전은 갓 창설된 미합중국 해군의 전환점이 되었다. 치열했던 이 해전에서 미합중국의 전함은 세라피스호를 나포하였다. 1913년, 존 폴 존스는 아나폴리스 미해군 사관학교의 예배당 납골당에 안치 되어졌다.
06 H.M.S. VICTORY (130cm x 78cm)

HMS Victory호는 영국 황실해군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함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취역전함으로서 황실해군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넬슨제독의 살아있는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모습도 위풍당당하게 제 2 드라이 독 (건선거)에 자리잡고 있는 HMS Victory호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전함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1759 ~ 1765년 사이에 건조되어 취역한 이 전함은 1등급의, 당시 최고의 전함이었다. 1805년, 넬슨제독을 태운 기함으로서, 총 28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상대적으로 훨씬 거대한 함대를 이루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상대로 트라팔가 해전에 참전하였다.
넬슨제독의 뛰어난 지휘와 전략에 힘입은 영국 해군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해전 중 하나로 꼽히는 이 트라팔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넬슨제독은 승리의 대가로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후갑판 위에서 자신의 부관인Thomas Hardy 대령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던 중 한발의 총탄이 제독을 관통한 것 이었다. 넬슨 제독은 바로 운명하였으나, 숨을 거두기전 자신의 마지막 해전이 승리로 끝났음을 알았다고 한다.
3500톤 무게의 HMS Victory호는 전장 226피트 (68.88m)에 정우현으로 51피트 (15.54m)의 길이었다. 선체는 만각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동판으로 덮여있었다. 항해 시 바람이 세차지면 총 36장의 돛이 매달렸는데, 그 총 면적이 수 에이커는 족히 되었다. 파도를 뚫고 시속10 노트로 항해가 가능한 이 전함은 36톤의 화약과 120톤의 포탄을 적재한, 기상 조건과 관계없는 그야말로 물위에 떠있는 하나의 요새라 할 수 있었는데, 한 번 출항하면 최장 6개월간 항해가 가능하였다. 1778년 정식 취역된 HMS Victory호는 트라팔가해전을 전후한 시대에 걸쳐 약 30년간 이란 세월 동안 많은 활약을 하였다.
07 SANTA MARIA (78cm x 55cm)

역사에 의하면 콜롬버스의 탐사대는 3척의 caravel 범선으로 (경쾌한 소형 범선) 이루어 졌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2척의 caravel 범선과 3개의 마스트에 2개의 사각 돛, 그리고 대형 삼각 돛이 장착된 “Nao”범선, 즉, 산타 마리아호로 이루어 져 있었다. 산타 마리아호에는 또한 앞갑판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 배가 갈리온배 (15-16세기에 사용된 대형 무장 상선 또는 carack)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튼튼한 설계에 훌륭한 선원들의 의지가 보태어져 1492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대륙발견을 이루었다.
08 LE SOLEIL ROYALE (102cm x 97cm)

'Le Soleil Royal’호는 태양왕 루이 14세를 기리기 위하여 1669년에 프랑스의 ‘브레스트’에서 건조되었으며,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전함들 중 하나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해군성 장관 ‘Jean-Batiste Colbert’에 의해 전력강화가 이루어진 새로운 프랑스 해군의 기함으로 등장한 ‘Le Soleil Royal’호는 프랑스 황실을 상징하는 여러 테마들이 선체에 새겨지는 등,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였다. 그 후, 1689년에 재 장비 되어져 ‘Anne-Hilarion de Cotentin’제독을 비롯하여 프랑스 해군의 총사령관인 ‘Comte de Tourvill’제독의 기함으로서 그 역할 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09 AMERIGO VESPUCCI (127cm x 74cm)

아메리고 베스푸치호는 1930년에 이탈리아 해군에서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훈련을 위해 건조한 해군 훈련함이었다. 선택된 훈련함의 디자인은 74문의 포가 장착된 프리깃함이었지만, 강철로 제작된 선체에 이중의 톱갤런트들을 비롯하여, 보조 동력장치를 비롯한 현대식 전함으로 제작되었다. 서쪽에 새로이 발견된 대륙의 이름을 따 명명되어진 아메리고 베스푸치호는 해군 훈련함으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10 H.M.S. ENDEAVOUR (77cm x 66cm)

HMS Endeavour호는 또한 HM Bark Endeavour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영국 황실 해군소속 탐사선으로서, 1769년에서 1771년 사이 James Cook 대위가 호주와 뉴질랜드를 발견한 그의 일 차 항해 때 사용되었던 배다.
1764년에collier Earl of Pembroke이란 이름으로 진수된 이 배를, 1768년 해군이 구입하여 태평양을 비롯해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잉코그니타’ 즉 ‘미지의 남방대륙’설을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탐사선으로 사용할 목적이었다. His Majesty’s Bark Endeavour란 새로운 이름으로 정식 취항된 이 배는 1768년 8월에 플리머스항에서 출항하여 ‘케이프 혼’을 우회하여1769 transit of Venus across Sun (금성이 태양을 가로지르는 현상으로, 100여년마다 두 번씩, 각각 8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일식이나 월식과 비슷한 현상) 현상을 관찰하기 위하여 타히티섬에 도착하였다. 그 후 그곳을 출항한 Endeavour호는 해도에도 실려있지 않은 미지의 남쪽 대양을 향해 출항하여, 태평양의 섬들인Huahine, Borabora, Raiatea 그리고Rurutu를 거치며 그곳들을 대영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렇게 1769년 9월에 그들은 뉴질랜드 연안에 닻을 내렸는데, 127년 전Abel Tasman’s의Heemskerck호 이 후 이 섬에 발을 디딘 첫 번째 유럽인으로 기록된다. 1770년 4월, Endeavour호는 마침내 호주의 동부 해안에 도달하였고, 쿡선장이 최초로 상륙한 지점이 바로 오늘날의 Botany Bay라는 곳이며, Endeavour호는 역사상 최초로 호주대륙에 닻을 내린 선박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 후 이 배는 호주연안을 따라서 북상하게 되는데, 대보초 (Great Barrier Reef)위에 좌초되면서 아슬아슬하게 대재앙을 피하게 되지만, 기본적인 선체 보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본토에 상륙하게 되었다. 1770년 10월 10일, Endeavour호는 온전치 못한 선체에 의지하여 보다 확실한 수리를 위해, 모든 선원들에게 그들이 발견한 남방대륙에 대한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다짐을 받은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의 옛 이름)의 바타비아 (자카르타(Djakarta)의 옛 이름)로 향하였다. 이렇게 12월 26일 그곳을 출항한 서쪽을 향해 항해를 계속한 뒤, 희망봉을 돌아서 1771년 3월 13일 마침내 거의 3년에 걸친 긴 항해 끝에 영국의 ‘도버’항으로 입항하였다.